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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의 이미지 관리】

기사승인 2020.03.31  04: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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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정의 표정〗

서정적 시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는 일이라 가장 진솔한 일생을 바라보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서정시의 특성은 곧 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면서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표정을 관찰하는 방법이 된다는 점에서 진실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금요저널 주필/문화연구위원/칼럼리스트/이승섭평론가

물론 서정시 특징은 함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조차 응축에 내포된다.

즉 서정시는 오로지 현재라는 시점에서 조망<眺望>의 기교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항상 내면으로 통하는 길을 지키는 긴장<緊張>이 요구되기 때문에 서정시의 긴장은 시인이나 독자에게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서정 시인에게는 언어의 탄력이 필요하며 이유이고 독자에게는 감동에 따르는 정서의 환기 현상이 되기에 언어의 배열이나 시적인 기교와 장치의 여부에 부응하는 종합적 성분이 좌우하는 일종의 인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라는 것은 언어를 재료로 하여 감정을 부추기는 일이 곧 시의 필요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인은 언제나 언어의 무게를 따지는 일이 우선 시 해야 될 것이다.

연숙연의 시는 다양한 소재의 특성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시인 것이다.

자연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소재로 등장하고 삶의 방법이 그 나름대로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생의 깊이를 방문한 나이에서 오는 원숙성이 보인다.

이는 고뇌의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 고개가 숙여지는 나이쯤에서 느끼는 사물과의 대화가 친숙성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는 주로 회고의 정념<情念>으로 나타났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소재는 희소한 것도 사실이다.

가을과 겨울, 봄의 계절 감각이 이를 뜻한다면 초목의 시적 대면이 많은 이유는 도시 중심이이 아니라 전원에서의 추억이 영향을 자극하는 인상이 짙다. 그리움의 정서가 많은 편 =

이러한 면은 여리고 여린 삶을 살아온 여적이 보이며 자식을 키우고 난 이후의 썰물에서 느끼는 허망의 뜻이 나타나고 사랑의 반추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지적에서는 생을 이어온 긴 호흡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가 있다.

이는 두 가지의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적인 특성에서 감상이 노출되거나 이미지를 장식하는 방법으로 흐를 수 있으며 아울러 길게 쓰는 서정시는 항상 요설<饒舌>을 부추기는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또한 호흠의 길이를 끌고 가는 언어의 운용<運用>의 기교를 갖추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길면 꼬리가 잡힌다는 말이 있듯이 길이 길어지면 적용되는 원리가 이치를 숙고할 만한 조언일 것이다. 이제 서정시의 특성의 문을 열고 연숙연의 시적 향기의 맛으로 들어가 보련다.

2.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1>사랑과 그리움

사랑이란 그 사랑의 쾌락을 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헌신이 자리할 때 그 마음에 차지하는 신기루이면서 오아시스가 되는 것이다.

순간에 자리 잡은 특징은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이를 영원히 장막으로 가릴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따스한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어머니의 사랑에서는 자애를, 이성의 사랑에서는 고귀한 꿈을 갖게 되는 것인 줄 안다. 사랑의 단계는 우선 그리움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푸르른 이름을 가진 사랑의 정원에 들어간다면 아마 그 곳은 행복의 나라가 있을 것이며 자유가 있을 것이다. 그 조짐이 보이는 것은 『빈 가슴』으로 시작되어진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발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갈증이면서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따르지 않을까 하는 의미에 이른다.

겨울로 내닫는

자주 빛 노을이

자수정 구슬을

지천으로 토해낼 때

그리움에 짓눌려

붉어진 두 눈에

쇠 풍 소리 헤집고

한줄기 쇠 바람은

정녕 그대의 전갈인지

허무 가득

빈 가슴에

스산하게 출렁인다.

=빈 가슴= 중에서

시간은 겨울의 황혼 무렵이고, 공간은 문풍지가 윙윙 거리며 우는 방안으로 설정 되었으며 시적 화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바람이이다.

스산한 황혼이 채색된 겨울바람이 거센 힘으로 다가오는 쇠 바람이 곧 그대의 전갈처럼 묘사되어 시심을 자극하는 듯하다. 이런 공허한 무드는 “슬픔 가득”이라는 무드로 탄생되어 “빈 가슴”을 점령하면서 출렁이는 정서가 그대에게로 향하는 전갈이 된다.

무엇을 가져오는 가는 정황으로 보아 슬픔이 연상된다. 된 쇠 바람의 썰렁함이 결코 부드러움이 부상될 수 없는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허전의 중심에서 시를 만나고 있는가?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시는 상상의 사물이고 상상력으로 포장된 시심이 곧 연숙연의 시인 듯하다. 허나 시인의 정서가 지향<志向>하는 방향은 내성적이며 부드러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사고의 일정인 듯하다.

내면적인 사람의 시적 취향과 외면적인 사람의 취향은 시에서는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성격과 상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여 거기서 위안을 찾고 평안을 찾는 의도가 앞서기 때문이다. 가령 소월<素月>의 시가 갖는 지향은 내면적이고 여리고 여린 심성이 시에 스며 있는 것처럼, 시인과 시어의 선택에는 늘 밀접한 정서적인 연결고리가 작용한다. 때문에 연숙연의 시어는 실재의 모습과는 다른 상상의 길을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이 계절에는 늘

허전의 와서 외롭다

귓전에 윙윙 거리며

온 몸으로 부딪치다

갈매기 울름 소리에

메아리도 흩어져

슬픈 사랑의 영혼들의

넋을 잃은 몸부림이

마다하지도 않고

끌어안아 넉살좋게

내 엄마 품안 같은

그대는 겨울바다

=겨울 바다= 중에서=

“그대”라는 미지<未知>의 대상과 겨울은 언제나 연결 되는 듯하다. 이런 이미지는 겨울의 스산한 이미를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대칭되고 있다.

이동<移動>의 느낌인 “갈매기”에 이끌려 시인의 정서가 이동하는 메아리로 흩어져 넋을 잃은 신열이 동반하는 정점의 비극에서 길이 열리는 것이 엄마의 품안이라는 따스함과 평화로운 정서가 “그대”와 결합하지만 그대는 겨울바다라는 곤혹스런 비유가 이채롭다

동절기의 추위를 “그대”에게로 연결하면 추위라는 냉혹함이 따라오지만 “엄마”의 자애가 얼마나 시심을 녹이는가는 결국 역설적인 해석으로 유추할 뿐이다.

사랑이란 인간이 도달하고자 꿈꾸는 최종 목표이자 종착지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종점이고 인간 삶의 궁극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현은 곧 삶의 가치가 환산되는 것이다. 이상향이면서 자유의 중심인 곳이 곧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랑의 이름에는 항시 그림자가 따라오는 경계가 있어야한다.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건너야 하는 다리가 많고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 시인은 시 한편을 건지기 위해 진력<盡力>하지만 그 속성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연숙연의 모든 대 다수 시어가 이런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자유를 주소서

아직 자유가 없어요.

떠날려도 떠나지 못함은

마치 묶여져 있기에

또한 그대가 준 금기이기에

내게 자유 없음은

그대 가슴에 촘촘히 짜 올린

사랑 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

위함인가 봅니다.

사랑이 말입니다.

= 사랑 =

사랑은 자유이면서 구속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혼합되면서 둘이 하나로 결합을 꿈꾸는 가상인 것이다. 아직 자유가 없다. 라는 것은 서로가 묶여 있기 때문이라 – 그대가 있기에 금기가 그어져 있고 “사랑 줄이기에” 이는 배타적인 결합이 아니라 자의적이고 묵시적인 구속 -

서로가 원하는 구속이라는 이중성의 사랑은 곧 사랑의 근본이요 끈인 것이다.

그대 가슴은

세상의 은빛으로

물 드린다.

무안한 밤바다

어둠 속이지만

하나로 묶여

별빛 속 부활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싶다.

=별 사랑= 중에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쪽의 자신이 하나로 묶여져야 비로소 하나의 사랑이 완성된다.

어둠에서 배려를, “별빛 부활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싶다” 천상의별은 고귀한 이미지이면서 상승의 가치 앞에 신비감을 더해 주는 것이다. 하늘의 별은 만질 수 없지만 상상의 나래 속에서 부활을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인도자의 순결을 전달한다는 뜻에서 사랑의 이미지는 무게를 갖는 빛에 이르기 때문에 이중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연숙연의 시는 그리움과 사랑이 존재하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굳이 현실적인 연관을 갖는 것보다 미지의 공간을 향하는 의식적인 상상으로 해석이 된다. 물론 명료함이 시의 본질은 아니다. 모호성<Abiguyty>이 시적인 본질이지만 의미의 일탈<逸脫>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과학적인 의미의 구축을 가져올 때 비로소 언어의 다양성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속에 서로 다른 다른 표정이라 하겠다.

이름만 떠올려도

수줍음과 미소가

가슴을 설레게 하고

내 성안에 들어와

온 몸으로 감싸주니

설레 임으로 부푼 내 가슴

난 그만

그대의 포로 되어

그리움만 태운다.

=그리움 타고=

대상 앞에 작아지는 것은 사랑의 진수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서는 자기<自己>가 없고 오로지 대상만이 크게 다가오기에 진실한 사랑에서는 자기가 대상에 내포되어진다. 이런 경험은 진실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행복의 종착지의 경험이다. 그대를 향하는 이름만으로도 “수줍은 미소”가 가득해지고, 내 의식의 성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설레는 행복감 – 이는 그대에게 포로가 된 구속<拘束>에의 행복을 만끽하는 역설인 셈이다. 이런 종말은 그리움으로 인해 행복의 정점으로 향하는 망아<忘我>의 경지 – 궁극의 행복에서 참된 우리의 성주가 되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에 이르는 행복의 전부일 것이다. 연숙연시인은 이런 사랑의 구축을 위해 시로 그의 생각을 나타내는 그리움과 사랑의 메시지인 것일 것이다.

2> 지식의 썰물

밀물이라는 뜻은 흥청이고 왕성한 혹은 가득 찬 것들의 의미를 갖는다.

그와는 이와는 반대로 썰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빠져 나간 것의 공허 혹은 그런 심리적인 공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자식을 키우느라 바쁜 젊은 날엔 부대끼면서 고달프게 함께 사는 의미라면, 이와는 달리 장성하여 모두 곁을 떠나면 부모는 허무와 맞닥뜨리는 텅 빈 시간을 물려받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훌훌 떠나버린 것 같은 심정은 외롭게 되고 고독이 출렁이게 되는 것이다. 『썰물』은 이런 상징성을 갖게 있는 것이다.

생에가 기록되는

아까운 시간들을

쪼개고 쪼개서

수직 상승한다.

하루살이 부제

생애 마지막 작업

종족 본능의 짝짓기

다시 따라간다.

그들의 터전

근원이 죽음의 블랙 홀

=미물 생애=

하루살이라는 부제<副題>가 있는 시이다. 하루살이는 짧은 생을 살다가는 미생물- 우주의 장구한 시간에서는 수유<須臾>의 찰나<刹那>이지만 하루살이 또한 하루를 살다가는 이치와 인간의 이치와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름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루살이도 종족의 보존을 위해 짝을 찾고 결국 죽어가는 숙명적인 운명에 따름임뿐 -

존재는 곧 죽음이라는 한계 속으로 들어간다. 죽음은 블랙홀이라는 점에서 모든 존재의 가치는 일정하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목 비틀리는 죽임을 눈치 보며 뱅글뱅글 돌아도 나갈 데는 더욱 없는 것이다.

수탉이 갇혀 사는 운명일지라도 꿈을 연상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점에서 자발적인 운명의 소유자와 의타적인 운명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분명 수탉은 우리에 갇혀 사는 존재이지만 그도 푸성귀의 미각<味覺>과 석양<夕陽>을 알리는 임무와 횃대에 대한 꿈들이 있다. 이를 달리하면 인간도 지구라는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일 뿐, 수탉의 운명과 다름이 없을 뿐이다. 닭장과 지구라는 크기에 따른 차별이 있을 뿐, 결국 운명이 정한 길을 따라 언젠가는 돌아가는 존재라는 일치점에서 우화<寓話>적인 깨우침이 남는다.

특히 『문』에서는 철학적인 뉘앙스 -

사는 일이나 죽는 일이 본질에서는 다름이 없고 하나의 문에서 만나는 이치와 같다는 인상을 줄 때, 심사<心思>한 사고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면 비트 겐 슈 탄 인의 “파리 잡는 항아리” - 이 항아리에 들어가면 파리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이 지구상에서 태어나면 결코 나갈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상승하는 게기가 詩된가 되는 것이다.

3> 길 찾기의 운명<에필로그>

詩는 대답을 말하는 길 찾기가 아니다. 다만 길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독자는 감동의 추수<追隨>를 거둘 뿐이다. 이는 개인차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로 이해될 분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의 해답은 시를 살아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편의 시에서 해답을 얻을 수도 있고, 문제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평론가

연숙연의 시에서는 해답을 얻는 일 보다는 문제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다.

이는 익어가는 풍경화에서 유유자적하는 생<生 >의 모습이 액자로 담겨 있기도 하고, 추억을 찾아가는 아스라한 이름들이 고향의 애정에서는 깊은 정감이 드러나고, 부모애의 사랑이 따스함으로 회고될 때 인간의 세계가 새삼 포근해지고 평안하다. 이는 오랜 연륜의 삶에서 비롯되는 맛깔 나는 점에서 연숙연의 시에는 마치 옛정에 그리움이 넘치는 고향을 방문하여 낙낙해지는 마음이 들뜨며 온 세상의 근심을 털어 버릴 것 같은 뉘앙스 -

차분한 어조<tone> 시를 그리는 시인이다.

2020. 03. 31.

금요저널 주필/문화연구위원/칼럼리스트/이승섭회장

학암포 낙조

연미란 기자 thesejongtv@daum.net

<저작권자 © 금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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